[안신영의 삶이 있는 풍경]31.國花 '무궁화(無窮花)'의 의미를 생각하다.
[안신영의 삶이 있는 풍경]31.國花 '무궁화(無窮花)'의 의미를 생각하다.
  • 안신영 전문위원
  • 승인 2021.07.20 06:0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경남 용원 안골포에는 무궁화 공원이 있다.

무궁화나무가 공원에 가득 심겨 있어서 평생 만나고 보았던 무궁화나무보다 훨씬 많은 것을 보게 되었다.

여름꽃인 무궁화.

우리나라의 나라꽃인 무궁화 공원인데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짠했다. 나라꽃인 무궁화가 다른 꽃에 비해 홀대를 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이다. 그나마 이곳에는 무궁화 이름 붙인 공원이 있어서 다행이기도 하지만, 벚꽃이나 장미 같은 꽃들은 각 지자체에서 축제도  많이 열지만 무궁화는 어디서도 축제의 마당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벚나무를 자기 나라의 국화(國花)라고 퍼뜨리는데 열을 올렸다는데, 그래서 침략을 하게 되면 벚나무부터 심는 열성을 보여서 우리나라가 벚나무의 원산지인데도 불구하고 일본이 원산지인 것처럼 여길 정도이다. 이곳의 무궁화나무에 꽃이 피면 장관인데 여름꽃이라서 아직 몇 송이 피지 않았다. 꽃송이는 많이 맺혀 있는데 몇 주가 지나야 모두 필 것 같다.

무궁화는 어떤 꽃일까?

무궁화는 우리나라의 나라꽃이다. 아욱과 에 딸린 낙엽 관목으로 종류는 200여 종이나 된다. 대표적으로, 원산지별로는 한국 무궁화 · 미국 무궁화 · 하와이 무궁화로 나뉘며, 계통별로는 단심계 · 아사달계 · 배달계로 분류한다. 무궁화는 가지가 많은데, 어린 가지에는 잔털이 많이 나 있으나 자라면서 없어진다. 키는 3m쯤 자란다. 잎은 어긋나기로 나고 달걀 모양이며 세 개로 갈라진다. 잎 끝은 뾰족하고 가장자리에는 톱니를 가지고 있다. 잎의 표면에는 털이 없으나, 뒷면 잎맥 위에 잔털이 있다.

7~10월에 가지 끝과 그에 가까운 잎겨드랑이에 한 송이씩 꽃이 피어난다. 꽃의 지름은 6~10cm 정도이다. 꽃의 색깔은 연분홍색이고 중심부가 붉게 물드는데, 전체가 희고 중심부가 붉은 것도 있다. 꽃이 지고 난 뒤 길쭉한 타원형의 열매를 맺는데, 익으면 다섯 갈래로 터져서 씨가 나온다. 무궁화는 4월 초에 잎을 서서히 틔우기 시작해서 6월 중순이면 꽃망울을 맺는다. 한 나무가 꽃을 피우는 기간은 약 100여 일에 이른다. 또한 한 나무에서 피는 꽃송이도 적게는 500여 송이에서 많게는 2,000여 송이나 된다. 우리나라와 중국 · 인도 · 일본 등지에 분포한다.

우리나라에서의 주요 품종은 꽃잎의 형태에 따라 홑꽃, 반겹꽃, 겹꽃의 3종류로 구분하고, 꽃잎 색깔에 따라 배달계, 단심계, 아사달계의 3종류로 구분한다.

꽃의 중심부에 단심(붉은색)이 없는 순백색의 흰꽃은 배달계라 하며, 단심이 있고 꽃잎에 무늬가 있는 종류는 아사달계라고 한다. 단심계는 꽃의 중심부에 붉은 무늬가 있는 것으로 백단심계, 홍단심계, 청단심계로 구분된다.

무궁화 연구를 했다는 기록이 있어서 첨부해본다.

1910년부터 일본은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통치하면서 역사와 전통문화를 차례로 말살해나갔다. 민족의 표상인 무궁화도 전국적으로 뽑아 없애버렸으며, 무궁화가 좋은 약용식물이라는 사실은 동서양에서 옛날부터 널리 알려져 온 사실인데도 유독 사람이 가까이하면 안질을 비롯한 각종 질병이 발생한다고 퍼뜨렸다.

약용식물로 널리 알려진 무궁화는 나무껍질과 뿌리를 각종 위장병과 피부병 치료제로 써왔다. 또한 꽃봉오리는 요리에, 꽃은 꽃차의 재료로 써왔으며, 나무껍질은 고급 제지를 만드는 데 이용하고 있다.

일본 통치 아래서 온 민족으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애국지사 남궁억은 강원도의 보리울에 은거하면서 많은 무궁화 묘목을 생산하여 전국적으로 배부해오다가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70 노구에 형무소에 투옥되었으며, 지금의 한국 보이 스카우트 연맹의 전신인 조선소년단· 조선 소년 척후대는 스카프의 무궁화 도안이 문제가 되어 해체당하기도 했다. 또한 <동아일보> 제호의 무궁화 도안이 삭제되었고 중앙 고등 보통학교의 무궁화 교표가 사용 금지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항복하고 대한민국이 수립된 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화훼학 연구실에서 무궁화 연구가 본격적으로 착수되었다. 1947년부터 유달영이 국내 벽촌에 드물게 남아 있는 무궁화를 전국적으로 수집하고, 세계 각국으로부터 여러 품종을 도입하는 한편, 신품종 육종과 생리 연구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후에 같은 연구실에서 학위를 취득한 염도의·김일중 등이 유달영과 한 팀이 되어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연구에 박차를 가해 큰 성과를 올렸으며, 뒤이어 원예시험장과 임목육종연구소에서도 무궁화 육종에 착수했다.

현재 한국에 널리 보급되고 있는 무궁화 품종의 대부분은 서울대학교 화훼학 연구실에서 육종·도입한 것이며, 품종의 이름도 배달·화랑·아사달·사임당·한서·소월·진미 등 민족적 정서가 깃든 이름을 많이 붙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 전국의 화훼 학계 교수들이 중심이 되어 한국 무궁화연구회를 발족해 무궁화 연구와 보급을 시작했다.(유달영: 농학박사, 수필가. 자연을 예 친하고 현대 도시의 비정하고 삭막함을 지적하였으며, 솔직 담백한 인간상을 그려 내는 철학적인 수필들을 썼다.)

한반도에서 무궁화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중국의 <산해경(山海經)>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 책은 상고시대의 지리·풍속을 널리 조사해 기록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책의 제9권 해외 동경(海外東經)에 "군자의 나라가 북방에 있는데…… 무궁화가 아침에 피고 저녁에는 시든다"(君子之國在其北……有薰花草 朝生募死)라는 구절이 있다. 군자 국은 한반도라는 것이 밝혀졌고, 훈화초는 무궁화를 일컫는 중국의 옛 이름이다. 또한 중국의 <고금주(古今注)>에는 "군자의 나라는 지방이 천리나 되는데 무궁화가 많더라"(君子之國 地方千里 多木槿花)라는 구절이 있다.

이상의 문헌만으로도 한반도에는 수천 년에 걸쳐 무궁화가 널리 자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신라의 효공왕이 897년 7월 당나라의 광종(光宗)에게 국서를 보낸 일이 있었는데 그 국서 가운데 신라를 자칭하여 근화향(槿花鄕)이라고 한 구절이 있다. 이 국서를 초한 사람은 중국에까지 문장가로 이름이 나 있던 최치원으로, 그의 문집인 <최문창 후문 집(崔文昌候文集)> 제1권에 그 초안이 수록되어 있는데, 이러한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이미 신라시대부터 한국을 '무궁화 나라'(槿城)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무궁화가 어떻게 한국의 나라꽃이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은데, 조선의 윤치호 등의 발의로 애국가를 만들면서 후렴에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는 구절을 넣음으로써 조선의 나라꽃이 되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대한민국이 수립된 직후인 1949년 10월 대통령 휘장과 행정·입법·사법 3부의 휘장을 모두 무궁화로 도안하여 문교부가 제정·사용했고, 1950년에는 태극기의 깃봉을 무궁화의 꽃봉오리로 제정했다.

여기서도 일본은 우리의 무궁화를  말살시키려 무진 애를 쓰며 가혹한 행위를 한 것이 나타난다.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안타까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안골포에서 있는 동안 늘 무궁화 공원을 둘러본다. 솔방울과 도토리 찾는다고 나무 밑에 엎드려 살피는 손녀 하율이에게 나직나직 무궁화 노래를 불러준다. 아기 때 업어 재우며 동요를 불러 주던 것처럼

"무궁화 무궁화 우리나라꽃 삼천리 강산에 우리나라꽃.

피었네 피었네 우리나라꽃 삼천리 강산에 우리나라꽃."

*photo by young.

*참고문헌; 다음 백과.

글/안신영 작가, 시인, 1994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전 수필문학 기자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