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신영의 삶이 있는 풍경]33.너른 마당과 광개토대왕, 그리고 장로님
[안신영의 삶이 있는 풍경]33.너른 마당과 광개토대왕, 그리고 장로님
  • 안신영 전문위원
  • 승인 2021.07.27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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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삼릉으로 가는 길목엔 범상치 않은 한옥의 '너른 마당'이라는 식당이 있다.

서삼릉 누리길 숲을 빠져나와 농협대학교를 지나 서삼릉으로 가려면 오른쪽으로 돌아야 하는데 오른쪽에 고풍스러운 기와집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뜰 한 옆에는 알 수 없는 큰 비석이 우뚝하니 서 있기도 하다.

그 앞을 지나 서삼릉을 산책하면서도 식당에 발을 들여놓기란 쉽지 않았다. 왠지 음식값이 비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통오리 밀쌈, 우리밀 칼국수, 빈대떡, 만두 등이 메뉴였다.

그렇게 지나만 다니던 식당에 친구와, 딸과, 브런치에서 만난 작가와 세 번은 다녀왔다.

그래서 그 비석이 광개토왕 대왕 비문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늘 신세를 지고 있는 목사님께 식사 대접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너른 마당으로 갔다.

주일 아침마다 도래울 마을에 살고 계시는 장로님을 모시러 가면서 삼송에 들려 나까지 태워 가시니, 이른 아침 문을 여는 제과점에서 커피와 샌드위치를 사서 두 분께 드리기도 했지만 부담이신지 돈 쓰지 말라고 하셔서 가끔 잊을 만할 때 하곤 한다. 신세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을 어찌할꼬!

몇 주 전 부산 다녀와서 주일에 예배를 마치고 드디어 마음먹었던 대로 목사님, 장로님, 행정 전도사님(여성)과 너른 마당으로 향했다. 

주차장에서 내려  동물 조각상이 잇는 곳으로 가려는데 장로님께서는 우리를 비석 앞으로 안내하셔서 설명을 해주신다.

식당 사장님이 원래는 농협대학교 입구 원흥역과 가까운 곳에서 국숫집을 했단다. 국숫집을 해서 돈을 번 뒤에 이곳으로 자리를 옮겨 문화재 버금가는 집을 짓고, 만주 지안(集安) 시 퉁거우(通溝)에 있는, 고구려 광개토 대왕의 비석, 한반도에서 가장 큰 비석을 집안(集安) 현지에 있는 바위를 깎아서 그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석수들의 힘을 빌려 탁본을 하고 비문을 새긴 다음에 우리나라로 운반해왔다고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지난봄에 비석을 보면서도 왜 여기에 있는지 까닭을 알 수 없었는데 의문이 풀렸다.

*기와와 목재를 사용하여 만든 식당 건물.

식당의 사장님은 우리 땅 되찾기 운동을 벌이고 계신 분으로서 만주가 고구려 역사에서 우리 땅이었음을 증명하는 자료를 찾아 간도 신문을 발행하고 계셨다.

광개토 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414년에 세운 광개토대왕비는 높이 약 6.39m, 너비는 1.38~2.00m, 측면은 1.35m~1.46m로 무게는 37톤에 달하는데, 화산에서 분화한 화산재가 굳어진 자연 응회암 비석 4면에 1,775자를 예서체로 새긴 비문은 150여 문자가 판독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를 다스린 22년 동안 동서남북으로 거침없는 정복활동을 펼쳤고 북만주와 동쪽의 읍루 지역, 남쪽의 한강유역과 서쪽의 요동반도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의 드넓은 영역을 누비면서 용맹을 떨쳤다.

그는 단순한 정복 군주를 넘어 아시아 속 고구려의 100년 대계를 머릿속에 꿈꾸고, 그 설계도를 따라 자신의 신념을 펼쳤던 강력한 두뇌 리더였으며 시대를 꿰뚫는 통찰력과 드높은 이상을 가졌던 지도자이자 전술가였다. 광개토대왕은 어려서부터 고구려가 세상의 주인이 되는 날을 꿈 꾸었다. 고구려라는 기존의 땅이 아닌 ‘동아시아’라는 커다란 판을 놓고 고구려의 미래를 그렸다. 자료에서 보듯 재 조명받는 광개토대왕의 업적은 실로 눈부신 것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을 느낀다.

만주 집안(集安)) 땅의 돌을 깎아 만든 비석을 배에 태워 운반하는 데시간과 경비는 엄청나게 들었을 것 같다.

해마다 10월에 호태왕 제라는 제를 올리면서 명사들을 초청해 우리 땅 찾기 세미나를 열기도 한다고 한다.

장로님의 상세한 설명을 듣고 이른 식사시간이라서 너른 마당을 둘러보기로 한다.

*별채건물의 식당은 코로나로 인해 닫고, 본채 건물만 이용한다.

지난겨울, 봄에 텅 빈 하늘만 비추던 때와 다르게 연못에는 초록 초록한  연잎이 작은 우산을 펼쳐 든 것처럼 가득했다. 7월엔 연이 활짝 웃음 짓겠다. 연못 둘레에 돌확에 심어 놓은 벼들이 소담스레 자라 있었고 주인이 키우는 한 필의 말은 아주 맛나게 벼이삭을 뜯어먹고 있었다. 가족 단위로 손님이 많이 오는 곳이라 토끼우리와 닭들을 넣은 닭장도 눈높이에 있다.

동물 조각상과 현대 조각상이 한데 어우러져 넓은 뜰 구석구석에 세워져 있다.

장독대마저 작품처럼 보이니 전도사님은 연신 사진 찍는 데에 여념이 없다. 푸르른 나무 밑에서 잠시 쉬다가

장로님께서 이름이 중요한 거라며 이름 짓는 것에 따라 운명이 바뀔 수 있는 너른 마당과 광개토의 연관성을 언뜻 비추신다.  광개토(廣開土)= 넓게 열은 땅, 너른 마당. 서서히 시장기가 돌아 식당 안으로 들어 가 자리에 앉으니 사장님이 오셔서 장로님께 인사를 한다.

*연과 벼이삭이 자라고 있는 풍경.

 장로님께서 통오리 밀쌈을 먹기엔 부담스럽다고 생각을 하셨는지 칼국수 2, 만두 1, 빈대떡 1을 주문하신다. 아마도 나의 얇은 지갑을 염려하셔서 그러신 게 분명하다. 국수는 둘 씩 나눠 먹으면 된다고 하시면서. 그래도 만두가 남았다. 남은 만두는 포장해서 장로님 간식으로 드시라고 드리면서 계산하면서 구입한 두부 과자를 한 봉지씩 선물로 드린다.

식사를 하러 와서 우리 땅 찾기를 하는 좋은 분의 사연을 알게 되었다. 식당 입구에서 매번 눈에 띈 간도 신문을 한 부 들고 나왔다. 장로님 말씀이 2036년 동북아 전도대로 되면 우리 후손들에게 얼마나 좋겠냐고 하셨는데 도무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를 못했는데 신문을 들여다보니 미국의 예언가인 죤 티토의 동북아 전도를 보고 이해가 되었다. 원래 한(韓) 민족이 2천여 년간 동북아의 종주국으로 단군 조선이 통치한 영역을 다시 수복한다고 예언한 죤 티토의 얘기였다.

*프랑스 파리의 소시에떼데미시용 에뜨랑제트가 1924년 발행한 조선말 한국지도 사진(위), 예언가 죤 티토의 동북아 전도 사진(사진).

세분과 헤어져 소화도 시킬 겸 피곤하지만 산책 겸 1km 이상 걸어서 집에까지 왔다.

코로나로 마음 놓고 식사자리도 못하는 가운데였지만 그래도 백신 1차까지 맞은 후이기도 했으며 점점 백신을 맞은 인구가 늘어나는 추세이긴 하다. 좋은 분들과 꼭 한번 식사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일을 하고 나니  마음이 편하다. 이래 저래 미뤘던 일을 하고 난 후의 긴장감이 풀려서인지 여독이 풀리지 않은 탓인지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겁다.

어제부터 무릎이 심하게 아파서 걷기가 불편했지만 걱정 끼쳐드릴까 봐 내색은 못했다. 용원 안골포에서 황포돛대 노래비 찾아 걷는다고 욕심껏 무리를 한 나 자신에게 미안했다. 간신히 돌아와 그대로 쓰러져 잤다.

그래도 사람이 최소한 할 일은 하고 살아야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어제, 오늘 다시 심각해진 코로나로 우울해져 있었는데 이상만 장로님(음악평론가)께서 대한민국 예술원상 수상자가 되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뉴욕 대학교를 나오시고 방송국 음악 피디로 일을 하실 때에 다시 서울대 음대에 입학하셔서 직장과 학업을 병행한 것으로 유명하신 분이란 것을 후에 알았다.

대한민국의 예술원상을 수상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운 영광스러운 상인 것을 안다. 예술원 회원 되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대한민국 예술원 상은 국내 문화예술계 인사 중 예술에 관하여 우수한 연구, 작품 제작 또는 현저한 공로가 있는 자에게 시상하여 창작의욕을 고취하고 문화예술 발전에 기여코자 1955년부터 시행해온 국내에 가장 권위 있는 상이다.

대한민국예술원에서는 문학/미술/음악/연극·영화·무용 분과별 회원의 예술창작 활성화 및 국민 문화향유 기회를 확대하기 위해 다양한 정기행사를 개최하고 있으며, 예술 경력이 30년 이상, 예술 발전에 공적이 현저한 예술인을 각 분과별로 추천을 받아 심사를 거친 후에 회원을 선출한다.

장로님 말씀에 의하면 올해 가장 많은 수상자(4명)와 회원(4명)이 탄생했다고 한다.

올해 최초로 음악 평론 분야에서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받으신 장로님께서는 그동안 우여곡절을 겪으시면서 인고의 세월을 보내오셨다. 정말 잘 되셨다. 모두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는 우리들은 마냥 기뻤다.

*우리 교회의 최고 멋장이 이상만 장로.

우리 장로님의 별명은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시다. 80 후반이신 연세이신데도 우리보다 책도 더 많이 읽으시고 전시회 음악회도 부지런히 다니신다. 기억력이 좋으셔서 예술문화계의 역사를 정확히 알고 계셔서 장로님 만나는 주일 아침마다 문화 예술 역사책 몇 페이지씩 읽은 느낌이 든다.

그동안 말씀하시는 것을 뵐 때마다 예사로운 분이 아니란 것을 알았지만 훌륭하신 분과 주일 아침마다 동행하는 영광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훌륭하신 어르신은 나이 드시는 게 정말 아까운 생각이 든다. 오래오래 우리 곁에서 건강하게 계셔주기를 간절히 소망해본다.

*엄지손가락 조각(위), 솟대(가운데). 보리수나무 열매(아래).

*photo by young.

*참고 문헌: 다음 백과사전.

글/안신영 작가, 시인, 1994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전 수필문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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