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신영의 삶이 있는 풍경]17.햇살 가득한 서오릉 가는 길
[안신영의 삶이 있는 풍경]17.햇살 가득한 서오릉 가는 길
  • 안신영 전문위원
  • 승인 2021.05.19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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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을 통해 서오릉 가는 길을 알아내고 종로에서 버스를 탔다. 서대문 지나 녹번동역 이전에 버스 환승을 하면 되는 코스였다. 다행히 알고 있는 버스 번호라서 안심이 된다.

서삼릉처럼 집에서부터 산책 코스로 잡기엔 먼 감이 있어 교회 예배를 마친 후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은 일을 실천하기엔 오늘 날도 좋았다. 어제까지 어찌나 황사가 심하던지 온통 거리가 뿌옇게 냄새까지 버석거리는듯했다. 중국의 선물인데 받고 싶지 않은 선물이라는 유머러스한 장로님 말씀에 목사님과 함께 나지막이 웃었다. 주일마다 도래울 마을에 계시는 연로하신 장로님 모시러 목사님이 출동하시는데 운 좋게도 삼송에 있는 나를 기억하셔서 그 셔틀에 편안히 앉아 주일마다 품격 있는 대화를 들으며 교회를 간다.

어버이 주일이어서인지 가족 단위로 나온 분들이 꽤 많아서 주차장이 혼잡한 것을 보니 얼마 전 막내가 서오릉 주차장을 헬 주차장이라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11호 뚜벅이로 걷는 내게는 헬 주차장이든 헐렁한 주차장이든 상관은 없는데 주차시키려고 밀려 있는 차량들을 보니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게 된다.

요즘 좋은 것 하나는 얼마 안 되는 입장료지만 신분증만 보여주면 경로우대 입장권을 받는 재미가 쏠쏠하다. 수원화성에서는 아직 생일이 안됐다면서 거부하길래 "서삼릉에서는 그냥 들어갔는데요" 하니 입장권을 주었다. ㅋㅋ.

서오릉은 사적 제198호. 5 릉은 경릉·창릉·익릉·명릉·홍릉을 일컫는다. 서삼릉처럼 한양의 서쪽에 오릉이 있기 때문에 서오릉이라고 부른다.

1457년(세조 3) 세자 장(璋:뒤에 덕종으로 추존됨)이 죽자 이곳에 안장(경릉)한 이래 1470년(성종 1) 덕종의 아우인 예종과 그 계비인 안순왕후 한 씨의 창릉, 1681년(숙종 7) 숙종의 비인 인경왕후 김 씨의 익릉, 1721년(경종 1) 숙종과 그 계비인 인현왕후 민 씨와 제2계 비인 인원왕후 김 씨의 명릉, 1757년(영조 33) 영조의 비인 정성왕후 서 씨의 홍릉이 들어서 능의 무리를 이루었다.

*여기서 추존追尊은 세상을 떠난 후 신분 등을 높이는 말로서 세자 장이 죽은 뒤에 둘재 아들 자을 산군이 왕이 된 후에 덕종으로 추존되었다고 한다.

*대빈묘.

이곳에는 명종의 큰아들인 순회 세자의 순창원이 경내에 있으며, 1970년에 숙종의 후궁인 희빈 장 씨의 대빈묘가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순회 세자는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13세에 죽었다. 공회빈은 1561년 왕세자빈이 되었으나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 왕비가 되지 못하였다. 1592년 세상을 떠났는데, 임진왜란의 혼란 속에서 시신이 수습되지 못했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신주(죽은 사람의 위패)를 만들어 순회세자와 합장하였다.

대빈묘 가는 길목엔 가는 잎 쐐기풀이 유독 많다.

대빈묘는 다른 능들에 비해 소박하다고 할까? 입구에 홍살문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으며 어로, 향로를 이루는 기나긴 길도 없다. 길 한 편 외로이 자리 잡고 있었으나 사람들은 그 앞에 서서 장희빈 묘를 보고 가야지 하면서 일행도 손짓하여 부르는 것을 보면 그의 악독한 행실을 들춰내어 경각심이라도 가지려는 것 같다.

장희빈이 한때는 인현왕후를 중상모략하여 폐위시키고 중전으로 있게 되지만 숙종이 후회, 반성하고 마음을 돌이켜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희빈을 사가로 내쫓아 사약을 내림으로서 죽음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 경종이 임금이 되면서 옥산 부대 빈으로 추존되고 묘의 이름을 대빈묘라 칭했다.어렸을 때 본 장희빈 연속극에는 희빈으로 오스카상의 배우 윤여정, 숙종으로는 배우 박근형 님이 열연을 한 것으로 기억이 난다. 표독스러운 연기를 어찌나 잘하던지 그때 이미 오스카상을 점찍어놨던 것은 아닐까?

 

*경릉; 추존된 덕종과 소혜왕후 한씨의 능.
*경릉; 추존된 덕종과 소혜왕후 한씨의 능.

경릉은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왕릉은 왕의 것이 오른쪽에, 왕비의 것이 왼쪽에 조성되지만 이것은 반대로 왕릉이 왼쪽에, 왕비릉이 오른쪽에 자리 잡고 있는 형식이다. 추존왕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왕릉에 나타나고 있는 난간석이나 망주석, 석수 등의 호위가 없다. 반면 왕비릉은 생전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므로 능제도에 따라 구색을 갖추었으며, 난간석의 기둥은 창릉의 형식을 따랐으므로 특이하다.

*창릉; 예종과 두번째 왕비 안순왕후 한씨의 능.

창릉도 몇 가지 특색을 지니고 있다. 즉 상석을 받친 석곡은 일반적으로 4개의 양각 귀면이지만 창릉은 문고리 모양을 조각했으므로 북과 흡사한 느낌을 준다. 또 난간석의 기둥머리는 연잎과 연주문이 보편적이지만, 창릉의 큰 석주는 둥근 머리 밑에 환상 받침을 마련하고 사각 석주로 변천되어가는 형식을 하고 있어 당시 일부 남아 있던 고려 왕릉의 석주 양식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숙종 세번째 왕비 인원왕후의 능(명릉).

명릉은 조선 능제의 분수령이 되는 것으로서 그 특징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석물의 치수를 실물에 가깝게 했으며 부장품의 수량도 감소했다. 둘째, 문인석의 미소와 무인석의 늘어진 투구와 이마에 새긴 투구의 파상선 등은 1649년에 조영 된 장릉 석인의 모습을 따르고 있다. 셋째, 8각의 장명 등, 옥개를 4 각형으로 제도화했다.

*익릉, 숙종의 첫번째 왕비 인경왕후의 능.

그리고 익릉은 기본적으로 〈국조오례의〉 제도를 따르고 부분적으로는 임진왜란 이후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국조오례의〉국가의 기본 예식인 오례, 즉 길례(吉禮)·가례(嘉禮)·빈례(賓禮)·군례(軍禮)·흉례(凶禮)에 대해 규정한 예전(禮典)이다. 왕실을 중심으로 한 국가의 기본 예식이 되어왔으며, 고대 중국에서부터 황실이나 제후와 관련된 행사의 기본이 되는 의식절차이다

*홍릉 ; 영조의 첫 번재 왕비 정성왕후 서씨의 능.
*홍릉 ; 영조의 첫 번재 왕비 정성왕후 서씨의 능.

홍릉은 명릉보다 20일 늦게 조성했으므로 상설 제도나 석물 양식은 거의 비슷하다. 가령 문인석은 용모나 복식 상태 등에 있어서 그것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한 특징을 보여준다.

신록이 푸르른 오월은 능 주변을 푸르름으로 채우고 있으니 쓸쓸하기만 하다. 산책 나온 이들만 소란하다.

산새들의 지저귐이 압권이었는데 소쩍, 서쪽 하는 소리 같기도 하고 뻐꾹, 뻐꾹 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한 참을 울길래 녹음을 하려니 눈치를 챘나 그만 새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서삼릉보다 능과 원이 더 있어서인지 숲은 울창하였으며 청설모도 나무를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모습도 보였다. 소나무길, 서어나무 길의 산책로도 있었지만 2시간여를 걷다 보니 수술한 발이 아파오면서 더 이상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움을 남긴 채 다음을 기약한다.

글/안신영 작가, 시인, 1994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전 수필문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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