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신영의 삶이 있는 풍경]15.종마장 옆, 서삼릉 가는 길
[안신영의 삶이 있는 풍경]15.종마장 옆, 서삼릉 가는 길
  • 안신영 전문위원
  • 승인 2021.05.12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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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 아침 서삼릉 길로 들어섰다. 숲 속 산길을 걸으며 산새 소리 레 한 껏 부푼 마음을 두드리며 자박자박 푸르른 숲길을 걷는다.

몇 번 가는 길이지만 갈 때마다 느낌이 다르다. 우선 겨울과 초봄의 색깔이 다르고 완연한 봄이 이제 돌아갈 채비를 하는 시점에서는 온갖 나무들이 살랑이는 바람에 푸른 물결을 출렁이듯 서 있기 때문이다. 숲에서 나와 농협 대학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서삼릉은 숲길로 연결이 안 되기 때문에 어느 길로 가더래도 자동차 길을 만나 걸어야 한다.

이른 시간에 홀로 걷는 숲길이 무섭지 않냐고 물어 온 지인이 있다. 글쎄, 늘 한 두 사람 보였기 때문에 괜찮았다고 말했다. 한적한 길이라 그런가? 하지만 비 온 뒤의 상쾌한 공기에 비하면 아무렇지도 않기에 직진.

이리저리 둘러보며 길 사진도 찍고 종마장 사진도 다시 찍는다. 너무 일러 입장 시간은 기다려야 한다. 집에서부터 45분 정도 걸렸는데 9시가 되어야 들어갈 수가 있다고 한다. 주변부터 살피며 사진을 찍는다.

백송

서삼릉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이자 사적 제200호.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는 조선 왕조의 왕릉 희릉, 효릉, 예릉이 조성되면서 3 릉이 한양의 서쪽에 있다 하여 '서삼릉'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1970년 5월 26일 사적 200호로 지정되었다. 서삼릉에는 공개되어 있는 희릉, 예릉, 효창원, 의령원 등이 있고, 효릉은 왜 보이지 않냐는 나의 질문에

"블로셔에 다 적혀 있고, 입구에 안내판에 표기되어 있다. 개인 사유지라고 해서 공개가 되지 않고 있지만 관리는 하고 있다."라고 관리 직원이 얘기해준다.

매번 올 때마다 덜렁대는 성격인 나는 그 내용을 읽어 보지도 않고 화장실 벽에 걸려 있는 사진 속의 효릉을 보고 질문을 했던 것이다. 부끄러움도 잠시

"저기 저 보라색 붓꽃은 타래붓꽃이에요?"하고 물었다.

"우린 그냥 붓꽃이라고 불러요." 말을 거는 내가 이상한가? 무뚝뚝하고 불편해 보이는 관리직원(입구에서 표 받는)에게 그래도 고맙다고 깍듯이 인사는 했다. 다음에 올 때는 음료수라도 챙겨 드릴까? 관람 시간도 되기 전부터 와서는 뭘 그렇게 물어보고 귀찮게 하나? 의 관리자의 표정이 마땅치 않다.

*희릉; 중종의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 윤씨의 능

희릉으로 가기 위해 들어서니 희귀종인 백송 세 그루가 서 있다. 일반 소나무 껍질과 희끗희끗한 것이 특이한데 산책하다 만나는 소나무중에 백송이 군데군데 있는 것을 보면 이 지역에만 유독 자라고 있는 것 같다.

희릉으로 가는 길에 저 멀리서 흔들리는 하얀 꽃이 있어 가까이 가고 싶지만 길 아닌 곳으로 들어가면 간혹

"그쪽으로 가지 마세요!" 하는 소리가 들릴 것 같다. 지난번에 왔을 때 능 쪽이 아닌 가보고 싶은 지역으로 발걸음을 하면 어디선가 나타난 관리자가 소리친다. 같이 온 동생은 쑥이 싱싱하고 탐스럽다며 뜯다가 벌금 물린다는 말에 놀라 튀어나왔다. 풀밭으로 보여도 우리가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되는 곳, 능역이라서 그런가 보다. 그래도 줌을 당겨 사진을 찍고 검색하니 병아리꽃이라 한다. 이름이 예쁘기도 하지.

*병아리꽃나무

옆으로 종마목장이 보이지만 코로나로 개방이 되지 않아 미끈한 말은 보이지 않는다.

희릉이 보이는 먼 곳에 기수 둘이 말을 타고 달리는 것이 보이기는 한다. 왜 옆에 종마장이 있을까 궁금했는데 한국마사회에서 서삼릉 능역 정화를 위해 3,750평을 증여하였기 때문인 것을 능역 주변에 있는 기념비석을 보고서야 알았다.

*희릉으로 가는 길에 보이는 종마장.
*희릉으로 가는 길에 보이는 종마장.

희릉은 중종의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 윤 씨의 능이다.

본관은 파평(坡平). 영돈녕부사 윤여필(尹汝弼)의 딸. 1491년(성종 22) 7월에 호현방(好賢坊) 사제(私第)에서 태어나 이모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의 부인에 의하여 양육되었다.1506년에 대궐에 들어가 처음 숙의(淑儀)에 봉하여지고 1507년(중종 2) 중종 비 단경왕후 신 씨(端敬王后愼氏)의 손위(遜位)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1515년 2월에 세자(世子: 인종)를 낳은 뒤 그 산후병으로 엿새 만에 경복궁 별전(別殿)에서 죽었다. '에고 아기를 두고 어떻게 눈을 감았을까?'

*예릉; 철종과 철인황후의 능
*예릉; 철종과 철인황후의 능

현재 서삼릉의 3개 왕릉 중에서 제12대 인종과 인성왕후 박 씨의 효릉은 비공개다. 농협중앙회 젖소개량사업소 관할 안에 있어 축협을 통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의령원과 효창원이 있는 쪽으로 간다. 가는 길에 백당나무가 꽃을 피워 내기 시작했고, 간밤에 내린 비로 연분홍 산철쭉은 거의 다 지고 있었다. 진초록 비비추 밭 길을 지나 어릴 때 죽은 세손들의 능을 보러 간다.

*백당나무 꽃
*백당나무 꽃

효창원의 주인공 문효세자는 의빈 성씨(宜嬪成氏)의 소생으로 1782년(정조 6) 9월 창덕궁 연화당(讌華堂)에서 태어나 1784년 8월 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786년 5월 21일 창덕궁 별당에서 5세로 죽었다. 이에 시호를 문효, 묘(廟)는 문희(文禧), 묘소의 명칭은 효창 묘(孝昌墓)라 정하고 윤 7월 19일에 장례를 치렀으며, 1870년(고종 7) 12월에 효창원으로 승격되었다.정자각 뒤 원칙에는 혼유석, 장명 등, 망주석 1쌍, 문인석 1쌍, 마석(馬石) 1쌍, 양석(羊石) 1쌍, 호석(虎石) 1쌍이 배치되어 있으며, 묘소 좌측 아래에 신도비가 있다.

 

의령원의 의소는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큰아들로 영조의 손자가 되며 정조의 형이다. 1750년(영조 26) 사도세자와 혜빈 홍 씨(惠嬪洪氏) 사이의 첫째 아들로 태어나 그 해에 왕세손에 책봉되었으나 불과 3세 만에 죽었다.영조는 세손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여 예절을 갖추어 묘소를 꾸미고 사당인 의소 묘(懿昭廟)를 도성 내 영조가 왕에 오르기 전에 거처하던 창의궁(彰義宮)에 세워 절기에 따라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표석(表石)·장명 등(長明燈)·혼유석(魂遊石)·망주석(望柱石, 1쌍)과 문인석(文人石)·마석(馬石)·호석(虎石)·양석(羊石)이 각 2구씩 설치되어 있는데 규모나 장식은 모두 간소하다.

두 아기들의 묘 앞에는 말, 호랑이 등의 석상이 있는데 아무래도 아기들이 외로울까 봐 동무하라고 세워둔 것 같다. 얼마 전에 함께 왔던 작가는

"아기 때 죽으면 부모 가슴 멍들게 하고 불효했다면서 봉분도 없는데 이 아이들은 묘를 이렇게 크게 세우고 석상까지 세워놓았네." 그렇지 않냐고 동의를 구하는 작가에게

"아마도 왕족이라 죽어서도 호강하나 보죠." 했다.

일반 백성들이야 이렇게 호화 분묘를 할 수 있겠는가? 어쨌든 죽음은 남은 자의 슬픔이며 흘러간 세월이야 어떻게 할 수 있나? 무심한 하늘은 두둥실 흰구름만 띄워 보낼 뿐인 것을..

이른 아침 서삼릉을 찬찬히 둘러보며 궁금증을 풀고 나오는데 종마장에 말은 보이지 않고 초록의 싱그런 풀밭만이 바람에 살랑이고 있다.

글/안신영 작가, 시인, 1994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전 수필문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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