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신영의 삶이 있는 풍경]20.왕과 시민들의 휴식처 선정릉
[안신영의 삶이 있는 풍경]20.왕과 시민들의 휴식처 선정릉
  • 안신영 전문위원
  • 승인 2021.06.08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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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릉은 성종 대왕릉인 선릉과 중종 대왕릉인 정릉을 합쳐서 선정릉이라고 부른다. 이곳엔 원(圓)도 묘(墓)도 없으며 능(陵) 3개만 있다. 입구에서 들어가 오른쪽에는 중종 대왕릉, 왼쪽에는 정현 왕후릉, 중종 대왕릉이 있다.아주 간결한 느낌인데 땅은 널찍해서 산책하기에 좋다.능역에 들어서다 마자 아름다운 새소리가 반기는 것이 아닌가? 기분이 좋아 예쁜 때죽나무 아래에서 새소리를 녹음했다. 숲을 이루고 있어서인지 도심 한 복판에 있는데도 새들이 많다.

어치
딱새

어치와 딱새를 만났는데 딱새는 입에 먹이를 물고도 사진 찍는 앞에서 날아가지 않고 한 개라도 더 물을 생각인지 땅에 있는 것을 계속 쪼았다. 귀여운 녀석, 새끼를 먹여 살리는 어미새인지, 아빠 새인지 기특하기만 하다.이곳엔 때죽나무와 백당나무 꽃이 만개를 하였고, 소나무 오리나무 다음으로 때죽나무가 많아 보인다.나뭇가지마다 촘촘히 오밀조밀한 연등을 달아 불을 밝히듯이 꽃은 한결같이 예쁜 모습으로 피어 있다.

때죽나무
백당나무

짧은 소견으로 정확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또 다음 백과를 빌린다.

선정릉을 외국인과 함께 방문하면 대부분 놀라곤 하는데 나라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데다 복잡한 도심 한복판이라고 알려진 강남구 삼성동에 무려 24만 588제곱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숲이 있기 때문이다.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을 합쳐 선정릉(宣靖陵)이라 하는데, 선릉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1495년에 성종의 능인 선릉을 세웠고, 그 뒤 1530년에 성종의 제2계 비인 정현왕후(貞顯王后)의 능을 선릉의 동쪽에 안장하였다. 이는 왕과 왕비의 능을 정자각 배후 좌우 두 언덕에 각각 한 봉분씩 조성한 경우로 동원(同原) 이강(異岡) 형식이라 한다.그 후, 1544년에 만들어진 중종의 능인 정릉(靖陵)이 1562년문정왕후에 의해 경기도 고양군 원당읍 원당리에서 이곳으로 옮겨졌다. 원당리의 풍수지리가 좋지 않아 옮긴 것인데, 이곳 또한 매년 여름이면 능이 침수되어 재실에 물이 들어가는 피해를 입었다. 결국, 중종과 함께 안장되기를 바랐던 문정왕후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현재 태릉(泰陵)에 홀로 안장되어 있다. 선정릉은 임진왜란 때 왜병(倭兵)에 의해 파헤쳐지는 등 수난을 겪기도 했으나, 현재까지도 도심 한가운데에 남아 보존되고 있다. 사적 제199호이고, 2009년 6월 30일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선릉과 정릉은 임진왜란 때 파헤쳐져 재궁이 전부 불타 버렸기 때문에, 선릉과 정릉의 세 능상 안에는 시신이 없다. 정릉의 경우는 좀 더 특수한데, 성종과 정현왕후의 능침에서는 아예 잿더미들만 나왔지만 중종의 능침에서는 시신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 시신이 중종의 것인지 아닌지를 가려내기 위해 원로 대신에서부터 궁중의 나인들까지 동원되어 살펴보았지만 중종이 승하한 지 오래되어 외모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몇 없었고 남은 사람들도 고령이라 확인이 힘들었다. 남아있던 기록과 시신의 모습이 달랐고 중종이 승하할 당시가 더운 여름이었는데 시신이 부패하지 않고 남아있다는 점 때문에 왜군이 왕릉을 욕보이기 위해 가져다 둔 시신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혹시나 중종의 라고 했었다는데, 어쨌든 선정릉의 세 능상은 모두 비어있으며(정확히는 보수하면서 새로 만들어 올린 의복들만 묻혀있다), 그 시신이 정말 중종의 시신이었는지 아닌지 확실하게 확인할 방법은 아직은 없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역시 일본은 가까이하기엔 껄끄러운 나라, 정이 안 가는 나라인 것은 분명하다.정현왕후 능은 울타리가 설치되어 있어서 가깝게 다가가서 볼 수는 없다.높아서 사진 찍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안타까운 내 심정을 아는 듯 어치 한 마리가 날아와 앉는다. 입에는 새끼에게 줄 먹이(거미?)를 물고 날 바라본다. 너처럼 날아라도 보란 말이더냐?

정현왕후는 영원부원군 윤호의 딸로 성종 4년(1473) 궁중에 숙의로 들어왔다가 윤 씨가 폐위되자 왕비가 되었다. 능은 병풍석 없이 난간만 있고 상설 물은 왕릉과 비슷하다. 성종의 문인석과 무인석이 굵고 강직하다면, 정현왕후의 문인석과 무인석은 섬세하고 아름답다는 평가다. 실제로 곁에서 볼 수 없으니 확인하지는 못하고 능 정면 사진은 인터넷에서 구했다.

그래도 신로(神路)라 해서 성종 왕릉의 동쪽 편에 홀로 있는 정현왕후 능으로 길이 연결되어 있는 돌길을 보고 조금 놀라웠다.

날은 화창하지요. 내방객들도 많았으며 곳곳의 벤치에는 혼자, 둘씩 앉아 봄볕을 즐기고 있다.

유치원 아이들도 모여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며 신나 한다. 나이가 좀 든 여자 사람들은 때죽나무와 오리나무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때죽나무의 별꽃 같은 꽃무리 앞에 친구를 세워 마치 수학여행 와서 찍는 사진처럼.

"이쪽, 아니 조금 더 왼쪽으로, 아! 됐다. 이쁘다."를 연발하며 사진을 찍는 것에 열중한다.

가끔 '남는 것은 사진밖에 없지' 라며 우리도 어딜 가면 사진을 많이 남겼던 생각이 난다. 머릿속에 남긴 것은 퇴색해지고 기억이 안 날 때가 많은데 사진으로 남겨두면 생각은 확실하게 난다. 여자 사람들은 추억을 쌓아가며 무덤 앞이라는 것이 무색할 지경으로 웃음을 하늘 높이 올리며 좋아한다.

성종 대왕릉 입구에는 좌우로 두 장군의 석상이 세워져 있고 동물의 석상들도 종류가 많은데 문인석과 무인석은 조선 왕릉 석물 가운데 가장 웅장하고 거대하다는 평가를 받는다.성종처럼 운이 좋은 왕은 별로 없다고 한다. 왕에 오를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지만 한명회의 사위가 된 후 조선의 왕까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왕위에 오르기 전 왕세자 교육을 받지 못하고 졸지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학문에 열중했다. 왕이 된 후에야 비로소 제왕학 교육을 받았으며 늦었던 만큼 성종은 열심히 공부했다.성종을 조선 왕조의 대표적 왕으로 꼽는 이유는 25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성종은 홍문관을 설치하고 『경국대전』, 『동국통감』, 『대 전속 록』, 『악학궤범』 등 각종 서적을 간행했으며, 세조 때의 공신 중심인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김종직 등 신진 사림 세력을 등용했다. 그의 조치는 성과를 거두어 왕권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조선 중기 이후 사림 정치의 기반을 조성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학자들은 성종이 조선 왕조의 정치, 경제, 사회적 기반과 체제를 완성해 조선 초기 문화의 꽃을 피웠다고 평가한다.학문을 좋아하고 풍류도 즐겼지만 성종의 개인사는 매우 굴곡져 있다. 그는 집권기 내내 훈구파들의 득세를 제압하지 못했고, 조선 왕실 역사상 처음으로 왕비를 내쫓아 아들 연산군에 의해 피의 보복이 이루어지는 단서를 고스란히 제공했다. 에효~

성종은 왕비인 공혜왕후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파주 순릉에 안장하고 원자(연산군)를 낳은 숙의 윤 씨를 계비로 삼았다. 윤 씨는 질투가 심해 왕비의 체통에 어긋난 행동을 많이 했다는 이유로 성종 10년(1479) 폐출되었다가 사약을 받는다. 윤 씨가 사사된 이유는 자신의 잘못 때문이기도 하지만 성종의 총애를 받던 엄 숙의, 정 숙의, 그리고 성종의 어머니인 인수대비가 합심해 그녀를 배척한 것도 큰 이유다. 어쨌든 이 일은 조선 왕조에 가장 어두운 시기를 초래하는 '갑자사화'의 동인이 된다.

성종의 굴곡진 개인 사이긴 해도 역시 역사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여인네들의 얽히고 설키는 이야기로 인해 더 재미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성종대왕릉

정릉으로 향하는 길에는 정갈하게 꾸려진 재실 앞 화단엔 붉은 해당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고, 보랏빛 붓꽃은 하얀 불두화와 대비를 이루며 능역을 화사하게 꾸며주고 있다.백당화와 찔레꽃은 제 세상인양 탐스럽게 봄햇살에 웃음짓는 모습이 있을 곳에서 있어야 더 빛나는 것처럼 당당하게 예쁘다.

불두화
재실
해당화

제11대 중종은 그야말로 격변기의 왕이다. 그는 성종 19년(1488) 연산군의 이복동생으로 태어나 진성대군에 봉해졌다. 하지만 1506년 박원종 등이 중종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위하고 13세인 그를 왕으로 추대했다. 반정을 주도한 사람은 성희 안으로, 평소 연산군의 방탕과 폭정에 불만을 품고 있다가 풍자적이고 훈계적인 시를 지어 올렸는데 이것이 연산군의 미움을 샀다. 연산군은 당시 이조참판 겸 부총관이었던 성희 안을 종 9품 무관인 부사용에 임명했다. 현대로 치면 장군에서 일등병 정도로 강등당한 것이다.그 후 성희 안은 박원종을 만나 반정을 모의한다. 1506년 9월 1일 훈련원에 무사들을 결집한 그들은 창덕궁 어귀의 하마비동에서 영의정 유순, 우의정 김수동 등을 만나 성종의 계비이며 진성대군의 어머니인 대비 윤 씨에게 거사 계획을 알렸다.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대비는 신료들의 요청이 계속되자 연산군 폐위와 진성대군의 추대를 허락하는 교지를 내렸다.대비의 교지를 받은 반정 세력은 권신, 임사홍, 신수근 등 연산군의 측근을 죽인 다음 궁궐을 에워싸고 옥에 갇혀 있던 자들을 풀어 종군하게 했다. 다음 날 박원종 등은 군사를 몰아 경복궁에 들어가 연산군에게 옥새를 내놓을 것을 요구한다. 사태의 심각함을 안 연산군은 옥새를 내줬고, 반정군의 호위를 받으며 경복궁에 도착한 진성대군은 조선 제11대 왕 중종으로 등극한다.중종은 연산군 때의 폐정을 잘 알고 있으므로 새로운 왕도 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정국은 그의 의도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중종은 철인 군주 정치를 표방해 훈구파를 견제하고 사림파를 등용했지만, 과격한 개혁 정치는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당파 논쟁이 끊이지 않아 기묘사화(1519)가 일어났고, 삼포왜란과 더불어 북방 국경 지대의 야인들이 번번이 국경을 침략해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중종대왕릉

점심때가 다가오자 근처의 직장인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들어오기 시작한다. 조용한 능역에서 멀찍이 떨어져 앉거나 걸으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신록이 무성한 숲에 아름다운 새소리까지 들리니 금상첨화의 왕데이트 코스이기도 하며 운동의 장소로 손색이 없다. 어떤 여성은 정릉 앞 홍살문에서 기념비 있는 데까지 사람들 시선은 개념치 않고 왕복 걷기를 하고 있었다. 신작로를 걷다 층층계단으로 올라가는 언덕을 넘고 능을 자세히 보기 위하여 발걸음을 하면서 능역을 한 바퀴 제대로 돌면 거의 7~8000보를 걷기 때문인지 작정하고 걷는 사람들도 많았다.

멀리서 본 중종대왕릉

오늘은 입장권을 돈을 내고 사야만 했다. 서오릉, 서삼릉은 신분증만 보여줘도 되었는데 12월인 생일이 아직 지나지 않았다면서 따지더라. 서울깍쟁이가 확실한 입구의 표파는 곳 여직원에게 돈을 내고 표를 받았다. 2009년 6월 30일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선정릉은 앞이 보이지 않은 분들을 위해 점자식 능 설명과 배치도를 점자판을 설치한 것을 볼 수 있다. 불편한 분들을 위해 세심한 배려를 했다는 것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짐을 느낀다.

복잡한 서울 시내 한복판에 이처럼 너른 공간이 있어 시민들의 휴식 공간이 되어 주는 것에 큰 고마움을 느끼며 산책을 마친다.

점자 안내도
병꽃나무

글/안신영 작가, 시인, 1994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전 수필문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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