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학살(虐殺)에 대한 小考-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
[특별기고]학살(虐殺)에 대한 小考-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
  • 안신영 전문위원
  • 승인 2021.09.28 19: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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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학살

지난번 전시에 앞서서 발행했던 피카소전 안내와 함께 이번에는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피카소 수차례 전시가 있었으면서도 오지 못했던 <한국에서의 학살>1그림이 오게 되어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그 림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난무했는데 제대로 파악하고 썼는지 무엇을 놓쳤는지 마음을 무겁게 짓눌러서 필히 전시를 보아야 할 것 같아서 전시장으로 향했다. 그동안  글 쓰는 사람의 책임감에 조금은 힘들었던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의 학살>은 맨 마지막 전시실인 7 전시실에서 궁금증으로 부푼 관람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에서의 학살>. 다음 캡쳐

그림을 그리고 발표된 지 70년이 지나서야 <한국에서의 학살>이 우리나라에 왔다말도 많고 탈도 많은 그림이라는 생각이 든다. 도대체 어떤 그림이기에 그럴까 하는 의문이 가장 많이 들었는데 가해자가 불분명하고 피해자는 양민들이어서 그랬겠지만 분명한 것은 한국전쟁의 참상은 아니지만 전쟁통에 한 마을에서 벌어진 일이었다는 사실이 경악을 금치 못하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개인적인 생각은 폭력적인 전쟁을 싫어하는 피카소의 항변이 그림으로 나타내 세계인에게 전쟁의 참혹성, 참담함을 고발하기기 위한 수단으로 그렸을 것이라 확신한다.

피카소는 예술작품이 단순히 감상의 도구나 집안의 장식품이 아닌 동시대의 부조리와 약자의 아픔을 대변하는 소통의 수단으로써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행동으로 실천한 화가였다.

1,2차 세계대전의 시대를 살았지만 전쟁 당사국 프랑스 파리에서 살았지만 피카소는 단 한 번도 전쟁에 참여한 적이 없다. 스페인 국적이라는 그의 신분이 양대 전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전장에서 희생된 동료 예술가들과 달리 그의 신변을 지켜 주었으나 1차 세계대전과는 달리 2차 세계대전이 남긴 전쟁의 참상과 상처는 그의 작품을 통해 표출되었다.

<게르니카>. 다음 캡쳐

스페인 내전을 배경으로 한 <게르니카 Guernica> 전쟁의 폭력을 고발하는 미술사의 가장 상징적 작품이 되었고 그의 손끝에서 탄생한 이미지의 힘만으로 동시대의 아픔과 소통의 장을 열었으며 그림이라는 조형 언어를 통해 인간의 부조리를 서슴없이 고발했다. 피카소라는 대가의 위대함이 여기서 빛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 갈 무렵 피카소는 <게르니카>에 버금가는 또 하나의 반전 작품을 제작한다. 뉴욕 현대 미술관에 소장된 작품 <시체 구덩이 Le Chrnir>이다<게르니카>와 같은 무채색의 단일 톤으로 주제가 갖는 무게감을 드라마틱한 분위기로 연출한 이 그림은 2차 세계대전 동안에 독일 나치 정권이 저지른 만행 유대인 학살을 고발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한 이듬해 피카소는 한국 근대사의 최대 사건인 한국 전쟁을 소재로 <한국에서의 학살 Massacre en Cor'ee>이라 명명한 작품을 완성한다.

<시체 구덩이>. 다음 캡쳐

<게르니카> <시체 구덩이>이와 더불어 피카소의 3대 반전 작품으로 여겨지는 이 작품은 당시 팽배했던 이데올로기적 논쟁을 떠나 앞선 두 작품과 같은 맥락에서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무력으로 자행한 양민 학살을 소재로 하고 있다.

19525월 파리 살롱전에서 처음 발표된 후 무려 70년 만에 한국 땅을 밟은 그림 <한국에서의 학살>이다. 제목 때문에 35천여 명의 양민 학살이라는 초유의 사건을 다뤘다는 그림이라서 많은 한국인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그림이기도 하다.

사실 이 그림은 작품 제목을 제외하면 그림에 등장하는 배경이나 인물은 한국 전쟁의 실상과는 거리가 멀다. 제목과 달리 학살의 주체가 누구든 간에 전쟁 폭력으로 희생되는 무고한 양민 학살에 대한 범 인류적인 고발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게르니카> 제작과정. 사진 작가 도라 마르는 피카소의 연인

위대한 화가로 칭송받는 피카소는 입체주의의 발명이 서양미술사에서 그가 이룩한 가장 위대한 업적이기도 하다.  작품의 존재 이유와 의미를 정립하고 예술 작품을 현실과 소통의 도구로 이끌어 낸 피카소의 업적 또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반전反戰 예술의 상징이 된 작품  <게르니카>가 있다. 19375월 피카소는 파리 만국 박람회 스페인관에 전시될 8m에 달하는 대작  <게르니카>를 완성한다. 스페인 내전 중에 일어 난 양민 학살을 주제로 한 이 작품은 무고한 양민들에게 자행된 무자비한 전쟁 폭력을 고발하는 피카소의 반전 작품의 효시를 이루는 작품이다. 스페인 내전은 인민 전선의 정부군과 프랑코 군부가 이끄는 반군 사이의 4년에 걸친 내전으로 1939년 프랑코 군부의 승리로 끝이 났다.

스페인 내전 동안에 독일 나치 정권과 아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의 지원을 받아 프랑코 군부는 독일 콘도로 항공대와 이탈리아 항공대를 동원하여 1937416일 스페인 서북부 바스크 지방의 도시 게르니카를 폭격한다. 인구 7천 명의 작은 도시를 불바다로 만들고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낸 이 비극은 최초의 민간인 폭력 사건이자 무고한 시민들에 대한 대학살로 기록된 사건이다.

피카소는 스페인 정부의 요청으로 만국 박람회 스페인관을 대표할 작품을 고심하던 중에 게르니카의 소식을 전해 듣고 조국의 비극을 작품으로 완성하고 난 직후

"그림이란 집안을 장식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이것은 적에 대한 공격과 방어의 전쟁 도구이다."라고 피카소는 말했다.

루벤스의 헤롯왕의 <유아 학살>. 다음 캡쳐

양민 학살의 그림은 구약 성서 출애굽기에 나오는 헤롯왕이 예수 탄생에 즈음하여 2살 이하의 베들레헴 지역 아이를 말살하라는 형상화한 16세기 플랑드르 화가  피터 브루겔(Piter Bruegel)을 비롯해 루벤스(Rubens)와 푸생(Poussin)의 작품에 등장한다.

양민 학살의 실제적 사건을 그린 대표작은 1608년 스페인의 궁정화가 프린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1746-1828) <마드리드 180853>이다 스페인을 점령한 나폴레옹 군대가 마드리드 시민의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저지른 시민 학살을 소재로 그린 대작으로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에 구도적으로 모티브를 제공한 작품이다.

프란시스코 고야<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 다음 캡쳐

피카소의 현실 참여 작품은 무차별적 전쟁 폭력에 희생당하는 무고한 시민들의 학살이라는 주제에 국한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손 끝에서 탄생한 비폭력과 평화의 메시지는 그 어떤 것보다 강력하였기에 예술이 인간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해 주었다.

<한국에서의 학살> 그림 앞에는 역시나 관람객들이 많이 모여 이리 보고 저리 보며 관심을 표했다. 그들 틈에 섞여 그림을 감상하면서 사전에 습득한 지식을 총동원하여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림은 <게르니카>와는 전혀 달랐다. 고야의 그림에서 구도적 모티브를 제공받아 그렸다는 것은 확실하게 인지 되었다. 이 그림은 평론가들이 얘기한 것처럼 전쟁통에 벌어진 일이긴 하지만 총칼을 겨눈 군인도 없을뿐더러 가해자 측에서 자신들의 이해 득실을 위해 악귀처럼 수 만 명의 사람들을 죽였다는 생각이 든다.

감히 논하기 어려운 예술성이라던가 하는 관점 보다도 피카소 자신이 전쟁의 폭력성을 고발하기 위한 반전 그림으로만 봐야 하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이 그림을 놓고 말도 많고 탈도 많다고 한 것은 인천 상륙작전으로 들어온 미군들이 저지른 만행이냐. 기독교인들이 양민을 학살한 것이냐에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다.

발로리스 예배당에서 <전쟁과 평화>를 그리고 있는 피카소

원로 소설가 황석영 씨는 단연코 기독교인들이 양민을 학살했다고 단언을 하고 소설을 썼다. 최근 펴낸 "손님"이란 소설에서 기독교인들이 양민을 학살한 지옥도라며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미군이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끼리 그랬는데 특히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했다는 거죠. 굉장히 거기에 충격을 받았어요. 아 이건 우리끼리 한 짓이구나"

"같은 마을에서 밥 먹고 경조사 되면 같이 슬퍼하고 기뻐하고 그러던 사람들이 그 50일의 짧은 기간에 서로 악귀처럼 변해서 죽인 거야."

왜 그랬을까?

무슨 철천지 원수가 졌다고 서로 죽이며 수만 명이 학살되었는지 이해가 안 된다. 타임슬립이라도 해서 과거의 신천으로 가서 상황을 살펴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6.25 전쟁을 겪으면서 무고한 양민들이 죽어  굵직한 사건들이 많다직간접적으로 처하고 애간장을 녹이는 아픔을 간직한 채 사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아직도 우리의 세상에서 전쟁은 여전히 종식될 기미는 보이지 않고 아프간, 미얀마 사태도 우리를 슬프게 하는 아비규환의 전쟁인 것이다.

위대한 예술가 피카소는 그의 그림! 예술의 이름으로 비폭력과 평화의 메시지를 인류에게 강력하게 전한 것이다.

 

*photo by young40주년

(사진 하단 2장=도록 캡처)

참고;PICASSO Into the Myth

/안신영 작가, 시인, 1994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전 수필문학 기자 특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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