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신영의 휴먼스토리- 첫번째 이야기
안신영의 휴먼스토리- 첫번째 이야기
  • 안신영 객원기자
  • 승인 2019.08.09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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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여자프로골퍼 제 1호 강춘자프로

"사랑했나봐~ 잊을 수 없나봐, 자꾸 생각나~"

골프를 사랑한 그녀. 캐디도 없이 대회마다 백을 짊어지고 경기를 치뤘다는 여린 듯 다부진 그녀가 떠 오른다. 한국프로골프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그녀.

바로 한국여자프로골퍼 제 1호 강춘자프로이다.

유월의 무더위를 식히는 장맛비가 잠시 그치고, '한국 낭자군' 의 빅 루키 김주연 선수가 US오픈의 우승컵을 손에 넣은 날, 강춘자 프로와 전화 통화를 할 수 있었다.

핸드폰 칼라링에선 윤도현의 "사랑했나봐~ 잊을 수 없나봐, 자꾸 생각나~..."라는 노래가 경쾌하게 흘러 나오고 있다. 젊게 살고 있다는 느낌이 머리를 맑게 적셔 온다. 서로가 바쁜 탓에 만날 시간이 여의치 못해 마감시간에 쫓긴 작가는 일단 전화로 인터뷰를 하기로 한다.

전혀 꾸밈이 없이 밝은 목소리로 시종 차분하게 인터뷰에 응해주는 강춘자 프로에게 "강 프로께서 가장 자신 있다는 바로 그 벙커샷으로 US오픈에서 김주연선수가 환상적인 버디를 낚아 우승컵을 손에 넣었다. 남다른 감회를 느끼지 않는가?

"천운이라고 말하고 싶다. 먼 거리였죠? 벙커도 아주 깊었다. 그 상황에선 선수 누구나 1m 반 정도 붙여 놓는게 일반적이다. '우승자는 신만이 안다'라는 말을 실감했다. 김주연은 꾸준한 노력으로 얻은 실력에 운까지 따라 주었다. 학창시절 유망주였었고, 아마추어로서도 화려했다. 미국으로 건너가 5년동안 우승다운 우승이 없이 고생을 많이 했다. 인내하고 열심히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우승의 꽃을 피우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발머리 소녀의 도전

* 골프를 아르바이트로 시작하셨다고 하셨는데
당시엔 낯설고 생소했을 텐데 해 볼만한 운동이라고 생각하셨나요?
"중학 시절 배구를 했다. 배구도 죽은 볼을 서브 넣어 살리는 스포츠다. 골프를 접하고 무척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 작은 아이언 페이스로 공을 때려 날리는 일이 스트레스도 풀리고 아주 즐거웠다."

강춘자는 중학교 재학 시절 제53회 전국소년체전서 동메달을 획득할 만큼 잘 나가던 배구선수였다

효심이 깊은 강춘자는 그러나 자신의 힘으로 학비를 벌어 농사를 짓고 계신 부모님의 어깨를 조금이나마 가볍게 해드리고 싶었다. 여고시절 무작정 언니가 근무하고 있는 뚝섬 골프장을 찾아간다. 그리고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 의식도 남달랐던 그녀는 골프와 인연을 맺는다.

그렇게 맺은 골프와의 인연이 그녀 앞에 전혀 새로운 인생의 장이 열린게 된 것이다.

* 골프로 꼭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은 있었나?
"누구나 어떤 일을 할 때 꼭 성공하리라는 확신을 갖진 못할 것이다. 골프를 좋아서 했지만 성공은 미지수였다. 그러나 성격에 맞는 운동이다. 명랑하고 쾌활하고, 또 차분하기도 한 성격이 골프와 잘 맞아 떨어졌다."
한국여자프로골프의 산파

* 지금도 골프는 귀족 스포츠라고 한다. 당시에 골프라는 국민들의 편견을 극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이 되었던 것은 무엇이었나?
"아르바이트로 골프를 접했지만 재미있고 해볼만한 운동이란 생각이 들었다. 또 대회에서 이기면 상금이 따라왔으니 더 재미있는 일 아닌가? 좋아하는 일 하면서 돈도 따라 온다는 것은 금상첨화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에 경제적인 부까지 따라온다면 그것이 살아가는데 가장 큰 힘이 될 수도 있다.”면서 밝게 웃는다.

1976년 그 당시엔 여류 골퍼가 전무한 상황이었다. 아르바이트를 겸하면서 스승인 조태호 프로의 코치를 받았다. 클럽을 구입할 돈이 없어 드라이버, 스푼, 3, 5, 7, 9번 아이언과 피칭웨지로 구성된 하프세트로 2년간 연습을 했다.

9번 아이언으로 2년간 벙커샷 연습을 하다가 샌드웨지를 잡으니 그것이 너무 쉬워 마치 밥 주걱으로 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가장 자신 있는 샷은 '벙커샷'이라고 하는 그녀.
2년여동안 연습에 몰두하던 중 프로의 길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한국프로골프협회에서 여자부 선수를 모집했다. 그녀는 스승인 조태호 프로의 권유로 응시를 하게 된다.
요즘은 골프를 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 때만해도 응시생은 그리 많지가 않았다. 7명의 다른 경쟁자들과 함께 지난 78년 5월 경기 양주 로얄CC(현 레이크우드CC)에서 한국여자프로 최초의 프로테스트인 PGA 여자부 테스트에 응시한다.

그녀를 비롯해 구옥희, 안종현(타계), 이귀남, 김소영, 배성순, 정길자, 한명현 등이 응시했다. 그 중에서도 강춘자는 1위로 선발됐고 구옥희, 한명현, 안종현이 그 뒤를 이었다

당당하게 여자프로골퍼가 탄생한 것이다. 그들 모두는 한국 여자프로골프의 오늘이 있기까지 산파 역할을 성실히 수행해 왔다. 한국 여자프로골프사의 산 증인이 된다. 강춘자 프로가 한국여자프로 1호가 된 것은 그녀가 PGA의 선발전을 1위로 통과했기 때문이다.

* 여자프로골퍼로서 가장 힘든 일은 무엇이었나?
"힘든 일은 많이 있었다. 대회가 가장 힘들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매 대회마다 우승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풀리지 않는 경기를 잘 다스리지 못할 때 가장 힘이 들었다."
그리고 매년 대회는 4∼5개씩 열렸지만, 모든 대회가 남자프로대회의 '더부살이' 형식이어서 규모 면에서 남자대회의 반쪽도 되지 않았다.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이벤트성 대회인것이 항상 불만이었다. 여자프로 수가 적어 비롯된 불가피한 현실이었다.

자신의 젊음 모두를 골프에 의탁한 강춘자 프로를 비롯한 창립 여자 프로들로서는 용납이 되지 않았다. 지난 1982년 강춘자 프로는 구옥희, 정길자, 한명현 프로 등과 함께 야구 감독이었던 가네다 쇼지의 초청으로 일본으로 간다. 네 여걸들이 야망의 실현을 위해 일본행을 택한 거것이다.

그녀는 일본 테스트마저도 당당히 1위로 합격함으로써 일본무대에서의 가능성을 더욱 밝게 했다. 그러나 보다 큰 시련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던 일본무대 적응이 신통치 않았다. 그녀는 5년동안의 일본 생활을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과감한 결단으로 한국행을 한다.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