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동의 커피향기]4.영혼의 공간과 1페니대학, 그리고 커피하우스
[김성동의 커피향기]4.영혼의 공간과 1페니대학, 그리고 커피하우스
  • 김성동 전문위원
  • 승인 2020.06.25 1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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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볶는 에티오피아 여인
커피볶는 에티오피아 여인

"커피하우스에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이곳에는 정해진 자리가 없으며,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면 누구나 의자를 차지하고 앉을 수 있다. 평등이라는 이러한 위대한 특권은 인류의 황금시대와 커피하우스에서만 찾아 볼 수 있었다."('커피와 커피하우스의 특징'-존 스타키)

현대를 살아사는 우리는 공기의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듯 누구나 들락날락해도 아무도 제재하지 않는 곳이 바로 커피숍일 것이다. 물론 커피값 등 식음료값은 지니고 있어야 하지만. 요즘에야 지천에 깔려 있어 느끼지 못하는 것이 커피숍이지만, 옛날 옛적에는 커피하우스만큼 자유로운 공간이 없었다는 것을 실감하기가 쉽지가 않다. 특히 계급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했을 터. 

사실 정부에서 무엇을 제재하거나 금지하면 그것처럼 불편한 것이 없다. 주제가 조금 빗나갔지만 장발과 미니스커트가 그렇다. 1970년 유행하던 장발에 청바지, 그리고 통기타는 기성세대에 대한 반발과 분노를 드러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미니스커트는 1967년 미국에서 활동하던 가수 윤복희가 귀국하면서 입고 들어와 크게 유행한 옷이다. 결국 장발과 청바지, 그리고 미니스커트는 젊은이들의 자유와 함께 저항의식의 수단이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않았으니까. 정부가 가만히 보고만 있겠는다.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를 들어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했다. 옷과 머리카락이 '경범죄처벌법'에 해당한 것이다. 한술더떠 노래까지 트집을 잡아 금지곡을 선정했으니, 겉으로 민주주의지만 자유는 통제됐던 시절이다. 불과 50년전이다. 이때만 해도 경찰이 여자의 치맛자락을 자로 재고, 가위를 들고 다니며 머리를 싹둑싹둑 잘랐던 것이다. 단속에 걸리면 머리카락을 깎은 뒤 풀어주고, 거부하면 즉결심판에 넘기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런 단속은 1980년대에 가서야 풀렸다. 미니스커트와 장발이 전염병이 아니라는 이유로. 지금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일이겠지만 피끓는 젊은이들은 죽을 맛이었을 게다.

카페 띠이모 필리핀 점
카페 띠이모 필리핀 점

사실 이전에 호텔 커피숍은 아무나 드나들지 못했다. 호텔에 숙박을 해야만 가는 곳인줄 알았으닜까. 지금이야 호텔 커피숍도 자유럽게 오고 간다. 여기에 로드숍인 커피하우스도 널려 있다. 카페 띠아모를 비롯해 스타벅스, 탐앤탐스, 앤절리너스, 할리스커피, 이디아커피, 투썸플레이스, 커피빈, 카페베네 등 셀수 없을 정도로 많다. 여기에 개인 커피브랜드 숍까지 더하면 한국도 거의 커피왕국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재미난 사실이 있다. 요즘 커피숍은 친구들과 어울려 담소를 나누는 것은 기본으로 하고, 노트북을 켜놓고 작업을 한다. 혹은 공부를 하거나 책을 읽는다. 출근할 때 아침 식사까지 해결할 수 있는 곳도 커피숍이다. 커피숍이 커피만 파는 곳이 아니라는 얘기다.

이런 상황이 17세기, 1600년대에도 비슷한 커피하우스가 있다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커피하우스는 과거와 현재가 잘 맞아 떨어진다. 커피가 처음 알려진 것은 9세기 경. 커피가 유럽문헌에 처음 출현한 것온 것은 16세기 경이다. 이탈리아의 식물학자가 쓴 '이집트 식물도감'에 커피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커피하우스가 처음 등장한 것은 언제일까. 세계 최초의 커피하우스라고 알려진 곳은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현재 이스탄불)에 1475년 개점한 키바 한(Kiva Han)이다. 그러다가 커피하우스가 융성한 곳은 영국인데, 커피가 영국에 들어온 것은 1600년대 초. 커피관련 문헌에는 1652년 영국 콘힐 지역의 세인트미카엘 성당 묘지 근처에서 처음 커피를 팔기 시작한 것으로 나와 있다. 하지만 2년 앞서 1650년 옥스퍼드의 커피하우스가 최초라는 기록도 있다. 커피숍이라기 보다는 포장마차같은 노점상으로 보면 된다. 커피가 인기를 끌자 커피하우스를 차렸다. 그리고 채 10년도 안돼 런던에만 100여개에 달하는 커피숍이 문을 열었다. 18세기 말에는 무려 1000개나 됐다고 한다.

17세기 런던의 커피하우스. 사진출처=COFFEE INSIDE
17세기 런던의 커피하우스. 사진출처=COFFEE INSIDE

물론 당시 커피하우스가 지금처럼 이탈리아에서 처음 나온 에스프레소 기계에서 뽑아내는 커피는 아니었다. 물론 기계는 독일이 먼저 만들었다. 지금도 에디오피아에는 그런 곳이 남아 있지만 그냥 커피를 볶고, 즉석에 이를 갈아 물에 타거나 이미 내리 커피를 물에 타먹는 것이다.  

이때 생긴 커피하우스가 지금과 비슷하다는 얘기는 커피가 아니고 분위기였다. 여자를 빼놓고는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커피값은 1페니. 1페니는 0.01파운드로 우리돈 15원쯤 된다. 이때문에 커피하우스는 '1페니 대학'이라는 닉 네임이 붙는다. 

이유가 뭘까.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담소를 나누기도 하지만 심도 있는 이야기도 오갔기 때문이다. 정치, 문화, 경제, 사상 등 자신과 관계 있는 분야의 사람들을 커피하우스에서 만나 하루 종일 토론도 하고 커피도 마신 것이다. 최초의 근대경제학 불리는 '국부론'을 저술한 애덤 스미스(1723-1790년, 영국)도 런던의 브리티시 커피하우스에서 집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프랑스는 영국보다 20년 늦게 커피숍이 생겼다. 1672년 프랑스 최초의 커피숍이 파리에 생겼다. 지금은 최초의 커피하우스는 없고, 1686년에 오픈한 카페 프로코프가 여전히 건재하다. 커피광이었던 볼테르(1694-1778년, 프랑스)가 세계 최초의 근대식 백과사전인 '백과전서'를 카페에서 구상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미국의 커피하우스는 1671년 보스턴에, 뉴욕은 브로드웨이에 영국의 이민자가 최초로 문을 열었다.

한국은 어떨까. 

우리나라 첫 커피하우스는 서울 중구 정동 16번지에 있었던 손탁호텔이다. 이 호텔은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재위 1863∼1907)인 고종(高宗, 1852-1919년)이 외국인 접대용으로 지은 것. 호텔은 1896년에서 1898년 2년 사이에 건축된 것으로 알려졌다. 고종이 커피를 좋아한 탓이다. 프랑스계 독일인이었던 '미모'의 손탁(Antoinette Sontag)은 32세에 한국에 왔다. 그래서 호텔이름도 손탁호텔로 불렸다. 커피는 러시아공관을 통해 들어왔다.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1904년 이후 호텔 커피숍이 퇴락했다. 손탁은 1909년 러시아로 돌아가면서 커피숍도 없어졌다. 당시 왕의 거처였던 덕수궁과 가까이에 있었고, 주한 외교관들이 자주 드나들던 자리에 있었다. 

이런 커피하우스에 대한 역사는 차치하더라도 영혼이 자유롭게 숨쉴 수 있는 공간이 커피숍에서, 어떤 위대한 창작물이나 세계를 바꿀 연구물이 나올는지 궁금하다. 

글/김성동 카페 띠아모 대표이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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