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신영의 삶이 있는 풍경]63.진관사(津寬寺)와 태극기
[안신영의 삶이 있는 풍경]63.진관사(津寬寺)와 태극기
  • 안신영 전문위원
  • 승인 2022.01.18 0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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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올라와 친구에게 연락을 한 지 2년 가까이 되었다.

연락한 시점이 서로 만나기는 어려운 일이 있어서 곧 보자 했던 시간들이 코로나란 괴질에 퍼져 우리의 만남이 다시 미뤄졌다. 나중에는 백신 2차 까지 맞고 난 이후로 약속을 하자며 마음을 달랠 수밖에 없다.

친구와 나는 대학 동기이기도 그녀의 남편에게 4학년 마지막 축제에 파트너를 소개해 주었던 인연이 있기도 하다. 서로 잘 아는 형편이기에 서울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만나서 식사라도 하자, 보고 싶다는 남편의 말을 전해 주었다.

코로나로 미루고 미루었던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드디어 여름이 끝나갈 무렵에 만나지 못한 자가 10여 년도 넘은 우리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를 만나기 전에 무엇인가 선물을 하고 싶어 파우치를 만들고, 원석으로 팔찌와 마스크 줄을, 우리 나이에 꼭 필요한 목에 두를 작은 스카프를 만들었다.

원래 김포 신도시에서 살고 있어서 남편이 데려다주지 않으면 대중교통으로 서울 나오기가 힘들다던 그녀가 북한산 자락 밑으로 이사를 온 지 3년째가 되어 나랑 만나기는 수월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아침이 밝았고 그녀의 아파트 단지로 가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일찍 서두른 탓에 근처 편의점에서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전화를 했더니 달려 나와 집에 와서 마시면 될 커피를 바깥에서 마시냐며 혼쭐을 낸다.

안 그래도 마르고 작은 몸이 그동안 변함없이 서로들 주름살만 늘어 난 모습으로 반가운 해후를 했다.

집에 들어서니 친구 남편도 변하지 않은 삐쩍 마른 모습으로 반겨 준다. 대학 때부터 마른 몸이 6학년 5반을 넘었는데도 그대로인 것을 보면 그의 성격이 어떨지 가늠되시리라.

간단하게 선물 증정식과 시원한 음료를 마신 후에 아파트 단지를 둘러싸고 있는 작은 산. 이말산을 넘어 진관사로 향한다. 여자 둘은 그동안 쌓여 있던 아이들 얘기, 살아온 얘기를 푸느라 천천히 걷게 되자 친구 남편은"수다 떨지 말고 빨리 걸어라" 하는 재촉을 받는다.

단지 내 경관이 좋아서 나무며 하늘이며를 보며 걷는 나와 주변을 설명하는 친구랑 당연히 걸음이 느릴 수밖에 더 있겠나? 후후후~

친구는 일부러 그쪽으로 이사했다고 한다. 나이 들어서 많이 걸어 주어야 하고 남편의 퇴직도 한몫을 했다며

매일 집에서 평생을 일한다고 읽지 못한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다 한 달에 몇 권 씩 읽으며 지내는 남편의 취미는 독서와  아내를 데리고 산을 걷는 일이라고도 한다.

우린 새로운 꽃을 보면 사진도 찍어가며 끝도 없이 펼쳐지는 얘기에 열중하는데 제동을 거는 친구 남편"그러다 하루 해지기 전에 목적지까지 가지 못한다"며 서둘러 따라오라 한다. 친구와 둘이 다음에 저 남자 두고 우리끼리 오자고 약속을 한다.

사실 친구랑 나랑 대학 동기친구 남편은 전남편과 친구이다. 4학년 마지막 축제 때 제일 예쁜 친구를 소개해줬는데 그 후에 결혼, 지금까지 티격태격하지만  나와 다르게 그 둘은 함께 늙어 가고 있다.

진관사앞 한옥마을

이말산을 넘으니 북한산 자락 밑에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한옥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한옥 마을을 가로질러 위로 올라가며 친구 남편을 따라 말없이 걷게 되었다. 그의 설명을 들으니 진관사는 비구니의 도량이라고 한다.

진관사(進寬寺)는 유서 깊은 절이다. 예전부터 진관사진관사 말로만 듣던 절을 눈앞에서 구경하게 되었는데 하나씩 양파 껍질 벗기듯 진관사를 공부해 보자.

진관사(進寬寺) - 고려 현종이 진관 대사를 위하여 진관사(眞寬寺)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원래는 신혈사(神穴寺)였다고 한다.

고려 경종이 죽자 젊은 왕비는 왕태후가 되어 파계승 김치양(金致陽)과 정을 나누다가 사생아를 낳았다. 그때 목종에게 아들이 없어 태조의 아들이던 왕욱(王郁: 安宗)의 직손이며 법통을 이어받을 대량원군(大良院君)이 왕위 계승자로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왕태후는 대랑원군을 없애고 자신의 사생아를 옹립하기 위하여 목종에게 참소하여 숭경사(崇慶寺)에 가두고 죽일 틈을 엿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다시 삼각산 신혈사로 옮기도록 하였다.

신혈사는 진관(津寬)이 혼자서 수도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살해하기 쉬울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이 사실을 눈치챈 진관이 본존불을 안치한 수미단 밑에 지하굴을 파서 열두 살인 대랑 원군을 숨겼으므로 왕태후가 보낸 자객의 화를 면할 수 있었다.

3년 뒤 목종이 죽자 대랑 원군은 개경으로 돌아가 현종이 되었고, 1011년 진관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신혈사 자리에 대가람을 세우고 대사의 이름을 따서 진관사라 하였다. 그 뒤 진관사는 임금을 보살핀 은혜로운 곳이어서 여러 임금의 각별한 보호와 지원을 받았다.

그 뒤 1463년(세조 9) 화재로 소실된 것을 1470년(성종1) 벽운이 중건했다. 이후에도 몇 번의 중수가 있었으며, 6·25 전쟁 때 나한전 등 3동만 남기고 모두 불탔다1964년 재건을 시작해 현재 대웅전·명부전·나한전·독성각·칠성각·홍제루·종각·일주문·선원·대방 등이 있으며 비구니의 수도 도량으로 이용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찰에서 최초로 발견된 일제 강점기 태극기로 사찰이 독립운동의 배후 근거지나 거점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을 알려준 서울 진관사 태극기는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이다.

진관사 태극기는 불교계 등 다양한 계층이 주도했던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의 양상을 보여준다는 점과 항일 정신을 강력하고 생생하게 담고 있다는 점, 함께 발견된 독립신문류를 통해 태극기의 변천사와 그 의미를 밝힐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는 점에서 역사·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백초월은 1878년 2월 17일 경상도 진주목 영이곡면 성곡리(현 경상남도 고성군 영오면 성곡리 금산마을)에서 태어났다. 1890년 14세의 나이로 출가하여 지리산 부근의 의병 활동을 목격하고 본격적으로 항일독립운동에 참여한다.  

1919년 3·1운동 당시 불교계를 이끌던 한용운과 백용성이 체포되자, 초월은 그들의 뒤를 이어서 승려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3·1운1주년 만세운동, 일본 의회 독립 청원 등의 활동도 펼쳤다. 그리하여 1919년과 1920년에 구속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1930년대에 들어서서 일제가 중일전쟁으로 침략을 시도하자, 초월은 만주행 군용 열차에 '대한독립만세'라고 써넣는 거사를 주도했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친구 남편의 잔소리를 들어가며 절 경내를 한 바퀴 돌고 나서 근처에 있는 삼천사도 가기를 원했으나 내 발이 안 좋다고 사양하며 점심을 먹으러 갔다. 이제 어디를 가도 친구와 둘이 가기로 암묵적으로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달에 둘이 만나서 한옥 마을과 진관사를 한번 더 돌아보고 좋은 시간을 보냈었다.

남자는 나이 들어 퇴직하고 집에 있게 되면 잔소리가 늘어나는 것일까?

오랜만에 만나서 회포를 풀며 여유롭게 풍경을 감상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것을 이해를 못 하고 태클을 걸었다. 여자 둘은 상당히 불편한 마음으로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였으면 친구와 둘이 만났을 텐데 전남편과는 고교와 대학을 함께 나온 사이였기에 또 우리가 중매쟁이였기에 한 번은 만나고 지나가야 하는 통과의례이기도 했다. 부산에서부터 함께 공부하고 서울에서 4년 동안 대학을 다녔기에 서로를 알만큼 아는 친구사이였는데,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려 잘 살아갈 줄 알았는데 그 친구란 사람이 천하의 몹쓸 인간이 되었으니 그 심정은 오죽하겠는가?

그러나 이제는 20여 년의 세월이 쓰리고 아팠던 고통까지도 다 데려갔다.

친구 부부는 안타까워 하지만 되돌리고 싶지도 않거니와 되돌릴 수도 없는 세월이 아닌가?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치를 어디에 두고 살아야 하는지는 너무나도 분명한 일인데, 귓등으로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제대로 된 인격체의 인간이었다면 그런 사기꾼 같은 짓은 하지 않았으리라.

누구는 태어나서 독립운동을 하며 옥고를 치르기도 하고, 또 누구는 나이 어린 왕위 계승자를 살해하려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또 누구는 자신의 안일한 영달을 위해 비열한 거짓을 꾸며 가족까지도 버렸다.

인간사 행불행은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하지만 주변에 어떤 사람이 포진해 있는지도 중요한 것 같다.

나 자신도 중요하지만 늘 안위를 염려하며 잘 되기를 기원하는 친구의 애달픈 마음이 소중해서라도 우리 모두가 잘 지내야 할 것 같다.

친구 부부와 산을 넘고 한옥 마을을 둘러보며 유서 깊은 절을 돌아보는 시간이, 툴툴대는 친구 남편의 변하지 않은 성격을 탓하면서도 어쩌면 다시 올 수 없는 귀중한 추억이 되어 가슴에 남을 것 같다.

*photo by young.

*참조 ; 다음 백과

/안신영 작가, 시인, 1994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전 수필문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