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신영의 삶이 있는 풍경]60.안개속에서 떠오르는 것들
[안신영의 삶이 있는 풍경]60.안개속에서 떠오르는 것들
  • 안신영 전문위원
  • 승인 2022.01.04 07: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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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약된 치과 진료를 위해 집을 나선다. 유리창 너머로 늘 보이던 학교 건물이 보이지 않고 온통 하얗다.

온 세상이 뿌옇게 변한 것을 알았다. 순간 당황스러워 두리번거린다.

흰 광목 같은 천으로 휘감은 듯 안개가 속속들이 들어차 휩싸인 것이다.

먼 데서 보면 앞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캄캄하다가 몇 발자국씩 발을 떼면 비로소

물체가 드러난다. 이토록 짙은 안개를 만난 것은 처음인 것 같다. 마치 살다가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의 위기감 같은 심정이 되었을 때처럼 그렇다내 삶도 안개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 길을 걷느라

조금은 힘들었다.

삶이 탄탄대로를 걷는 것처럼 쉽다면 누군들 고난이라 여기며 힘들어할까.

완벽한(?) 인생설계를 했다 해서 그 길이 평탄한 것도 아니다.

호시탐탐 먹이를 노려 달려드는 맹수처럼 곳곳에 변수라는 함정이 이빨을 드러내고 공격한다.

그대 없인 못살겠다고 매달리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 전도유망한 사람이니 성공도 할 것이고, 계획

한 대로 밟아 나가면 원하는 지위에도 오를 것이라 생각하며 함께 삶을 꾸리는 세월이 어떤 변수도

물리쳐내는 용감한 사람일 줄 알았다. 그런데 전혀 아닌 사람이었고 비겁하게 뒤에 숨었다가 제가

편한 대로 가 버렸다.

살다 보니 기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상처를 가장 많이 받은 것 같다.

가족이니 마음 다해 사랑하고 내 전부를 걸고 목숨 다해 살았는데 상대방은 그러질 못한 것 같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옛말이 내게는 거의 다 들어맞았다.

뭐든 다 내 맘 같다고 경계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보니 늘 뒤통수 탕탕 얻어맞았다.

안갯속을 걷다 보면 저 멀리는 오리무중인 것처럼 보이나 전진하다 보면 주위는 보일만치 보여 걷

데는 큰 불편은 없으나 매일 걷던 길이, 건물들이 낯선 동네에 온 듯 조금은 낯설어 두리번거린

. 안개에 벗어난 건물이 보일 때 비로소 아, 여기가 거기네? 바로 지하철역이 보인다.

이처럼 가족이 변심했을 때 참으로 낯선 타인이 되더라.

남편도 큰딸도 내게 상처를 준 것에 아직도 완전 치유가 안되었는지 이 길을 걸으면서 삶을 되짚어

보게 된 것이다. 무엇을 잘못해서일까? 그들에게 난 무엇을 성에 차지 못하게 했을까? 시부모 공양

하며 종갓집 대소사를 요즘 말로 내 몸을 갈아 넣듯 열심히 바라지하며 가정을 지켰는데, 어느 날

내동댕이 쳐진 현실에 아득했다.

다 떠나간 과거지사인데 유독 오늘 같은 날 떠오르는 것은 안갯속의 미로 같은 길을 걸으며 희망을 

걸어 한발 한발 내디뎠던 나의 길이 한순간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풀 한 포기 부여잡을 힘도

내게는 남아 있지 않았었는데, 어떻게 살아왔을까? 돌아보게 된다.

그렇게 어찌어찌 살다 보니 여기까지 왔는데, 누구에게나 똑같이 부여된 시간 속을 헤매며 때로는

진실되고 맛깔나게, 어느 땐 부실하게 후회와 절망 속에서 허우적 대며 살아온 날들이 공존한다.

이제라도 허투루 살지 않겠다고 늘 생각한다.

안개를 헤쳐나가다 보면 밝은 햇살이 비추어 밝아진 길을 만난다.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나의 삶이지만 남들이 사는 만큼 살아 보려 애쓴 시간들이 녹아 여기까지 왔는

데 좀 우울한 감정은 무엇일까? 치과 진료를 받으면서 마취와 징징대는 기계음과, 약품 냄새로 혼이

절반쯤은 나간 것 같은 상황에서 더욱 침잠되어 가는 기분으로 헤매는 것 같다.

구름과 달

치아도 그렇지, 미리미리 게으름 떨지 말고 진료를 잘 받아 왔다면 좀 더 건실한 치아로 살아갈 수

있었을 텐데, 싫다고 미루어 병을 키운 꼴이 된 거지. 또 미리미리 예방에 힘써서 나쁜 상황이 오도

록 하지 말았어야 했던 거지. 뒤늦게야 깨닫고 정기적인 검진을 빼놓지 않고 하지만 이미 나빠진 상

황에서는 조심하고 유지만 잘해도 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치아 좋은 것이 왜 오복인지 깨닫고,

이 천냥인데 그중에 구백 냥은 왜 눈이라고 했는지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구구절절 어른들의 말

씀이 절실히 다가온다.

스쳐 지나듯 가버린 날들을 아쉬워하진 않으리라던 마음이 요즘, 부쩍 그땐 이럴 것을, 저랬으면 괜

찮았을까?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 젊다고 오만 방자하게 살았던 것도 아니면서 어느 순간만큼은 부

정하고 싶을 때가 있으니 나도 별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인가 보다.

이렇듯 젊을 때 생각하지 못하고, 가늠조차 하지 못했던 일들을 겪으면서 좀 더 겸허해지고 자중하

는 마음도 커지는 것을 느낀다.

오늘 하루를 보내면서 그동안 평온했던 마음들이 일제히 반기를 들며 아우성치는 소리를 질러대는

것은 웬일일까?

창릉천 밤의 물안개.

*photo by young.

/안신영 작가, 시인, 1994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전 수필문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