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신영의 삶이 있는 풍경]52.개실마을의 한옥의 미학
[안신영의 삶이 있는 풍경]52.개실마을의 한옥의 미학
  • 안신영 전문위원
  • 승인 2021.12.07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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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 수목원에서 나와 네비가 안내하는 대로 가는 길에 대가야 박물관 지선동 고분군들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현수막을 보며  개실마을로 향해 향숙씨는 부지런히 운전을 한다.

마음으로 더 돌아보고 싶은 대가야 박물관, 우륵 박물관들을 그냥 지나치기에 아쉬워 우륵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어 다음 백과를 열어 보았다.

우륵 기념탑(다음캡처)
지선동고분군(다음캡처)

우륵은 우리나라 3대 악성(우륵, 박연, 왕산악)중의 한 사람으로 가야 말기 가실왕의 명을 받아 대가야읍 쾌빈리 (정정골)에서 112달을 본 따 12 현금의 가야금을 창제하였으며, 위가 둥그니 하늘을 뜻하고 아래가 평평하여 땅을 본뜬 것이라 한다. 우륵은 평생 185곡을 만든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한 곡도 없으며, 다만 대가야국정정골에서 12곡을 작곡한 기록만 남아 있다. 악성 우륵의 위업을 기리고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는 등 군민에게 휴식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정정골이 한눈에 보이는 동산 위에 기념탑과 영정각을 건립하였다. 고령에서는 매년 가을 대가야 축제 때 우륵 선생의 위업을 기리는 추모행사를 올리고 있다.
 
 우륵이 가야국에서 지은 12곡은 상가라도(上加羅都)》 《하가라도(下加羅都)》 《보기(寶伎)》 《달기(達己)》 《사물(思勿)》 《물혜(勿慧)》 《상기 물(上奇勿)》 《하기물(下奇勿)》 《사자기(獅子伎)》 《거열(居烈)》 《사팔혜(沙八兮)》 《이사(爾赦)등이며, 이들 곡 이름은 대부분 당시의 군 ·현의 이름에서 따 온 것으로 해당 지역의 민요 연구에 긴요한 자료가 된다. 충주의 금 휴포(琴休浦)와 탄금대(彈琴臺)는 모두 그 이름이 우륵에게서 유래한다고 한다.(다음 참조)

우륵 기념탑과 개실마을 안내도

개실마을은 참 예쁜 마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종택 뒤로 대나무 숲이 있어서 안온한 느낌이 들었다. 후손들이 살고 있는 집안을 조용히 살피며 들여다볼 수 있어서 옛 정취를 느끼며 깔끔한 바깥 마당을 밟아 볼 수 있었다. 마을에서 숙박을 하며 농촌 체험을 해 볼 수 있는데 마을 앞으로 흐르는 소하천에서 하천변 생태 관찰과 피라미 잡기, 뗏목 타기, 썰매 타기, 물놀이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30여 가지 농촌 체험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점필재 종택

개실은 조선 중엽 무오사화 때 화를 입은 영남사림 학파의 종조 점필재 김종직 선생 후손의 새거지로서 본래 고령군 하동면 지역이었다.

꽃이 피는 아름다운 개, 골짜기 실이라는 의미로 개실이라 하였다. 마을 뒤로 높이 193.8m의 화개산과 약 370년 된 대나무 숲, 봄이면 진달래꽃이 만발하는 접무봉으로 둘러싸여 있고, 마을의 80%가량이 한옥을 유지하고 있어 자연경관과 기와선이 어울려 농촌의 정치가 물씬 풍기는 전통마을이다.

김종직은(1431~1492/세종 13~성종 23)은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로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효관(孝盥) 계온(季昷), 호는 점필재(佔畢齋)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431(세종 13) 밀양 대동리(한골)에서 태어났다. 1457(세조 3) 유명한 '조의제문'을 짓고, 1459(세조 5) 과거에 급제하면서 관료생활을 시작하였다. 정몽주와 길재의 학통을 이은 부친 김숙자에게 수학하였으며 일찍부터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사림의 종장이 되었다. 특히 후진의 교육에 힘써 김굉필, 정여창, 조위, 남효은, 유호인, 김일손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이들은 의리와 절의를 숭상하여 성리학의 발전과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정게에 진출하여서는 훈구세력과 대립하여 사림파를 형성하였다. 선생은 홍문관, 예문관 제학, 경기도, 전라도 관찰사, 형조판서 등 많은 관직을 역임한 후 1492(성종 23) 밀야 명발와에서 돌아가셨으며 사후 영의정을 추증받았다.

저서로는 점필재집, 유두 유록, 청구 풍아, 오경석의, 동문수, 동국여지승람 등이 있으며 무오사화(茂午士禍)로 인하여 수많은 문헌이 소실되고 약 1,200여 편의 시가 전해지고 있다. 제향 서원으로는 밀양의 예림서원, 금오서원 등 8곳에 이르고 있다.(다음 참조)

무오사화1498(연산군 4) 7월 김일손 등 신진 사류가 유자광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에 의해 화를 입은 사건이다, 성종대 이후 김종직과 그의 제자들인 사림파가 중앙에 등용되면서 훈구파와 대립이 심해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종실록>의 편찬 때 사초에 실린 '조의제문'이 문제가 되어 김일손 등 많은 사람들이 화를 당했으며, 김종직은 부관참시되었다가 1507(중종 2)에 중종반정으로 벼슬과 시호 등이 복권되었다. 이 사건은 조선시대 4대 사화의 첫 번째로 사초 문제가 원인이 되었다고 하여 '사화(史禍)'라고도 한다.

(*부관참시剖棺斬屍-무덤 속 관을 꺼내어 시신의 목을 베는 형벌.)

수세미

조의제문(弔義帝文)은 김종직이 1457(세조 3) 10월에 쓴 글이다. 항우에게 죽은 초나라 의제(義帝)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는 내용으로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단종을 의제에 비유하여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한 것이다. 후에 제자인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을 때 이 글을 사초에 적어 넣었는데, 이것이 무오사화의 원인이 되었다.

개실마을에는 대나무 숲과 하늘도 탐복한 점필재 선생 7대손 이후 5대를 거쳐 이어 온 효에 관한 잉어 배미의 전설, 마을을 둘러보면 370여 년 마을을 지켜온 대나무 숲과 더불어 도적굴도 있다. 1651년 어느 날 밤, 점필재 선생 6대손 남계 공 김수의가 꿈속에 의적이라 자치하며 찾아와 자기들이 감추어 놓은 금화가 뒷산 굴 속에 있으니 요긴하게 써달라고 하였다. 잠을 깨서 가보니, 대밭골 서쪽 산에서 굴을 발견하였고 금화를 찾았다. 이 사실을 관아에 고하였고 그 이후부터 이 굴을 도적굴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점필재 종택을 둘러보고 자주 닭의장풀을 창포꽃이라 잘못 알았음을 시인하는 시간이기도 했던 소중했던 날, 한옥 마을은 유년의 추억이 있어서인지 안온한 느낌을 준다. 마음이 편안해져서 우리 글벗들은 예쁜 마을로  회귀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갖기도 한다. 역시 도시보다는 시골 풍경에서 마음의 위안을 받는 것 같다.

다시 다음 일정으로 아쉬운 발길을 돌린다.

*photo by young

/안신영 작가, 시인, 1994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전 수필문학 기자